'스토리보드'라는 단어가 생소한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스토리보드와 영화 산업의 관계는 악보와 음반 산업의 관계와 같다. 스토리보드는 만화와 살짝 비슷한 형태인데 영화 장면 안에서 벌어지는 카메라 각도, 액션, 동작을 빠짐없이 자세하게 표현한다. 시각적인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 속도를 설정할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계의 전문가들은 대부분 스토리보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월트 디즈니와 그의 전설적인 "9명의 늙은이들(「백설 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은 디즈니 고전 장편 만화의 대부분을 이끌었던 월트 디즈니의 핵심 애니메이터 팀)" 덕분이라고 보고 있다. 이 '스토리 아티스트'들은 애니메이션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작은 사각 종이에 장면을 스케치하여 디즈니에게 보여 줌으로써 영화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체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수정 사항이 있을 경우 비교적 쉽게 반영할 수 있어서 시간, 노력, 비용을 절약했다.
당시 대본은 스토리 아티스트들이 작업 시작단계에서 참고할 수 있는 대략적인 아웃라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각 장면을 그려나가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전개에 따라 스토리가 바뀌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이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많았다. 작업을 해 나가는 중에 시각적인 개그를 넣어서 완성된 작품에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느낌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모든 애니메이션 영화와 다수의 실사 영화들이 따르는 모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워너 브러더스의 유명한 「루니 튠」 극장용 단편 역시 이 방식을 채택하여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미국 애니메이션의 대다수가 전적으로 대본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공장과 같은 생산 라인 방식 때문에 예전의 디즈니 및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터들처럼 '자유로운 이야기 전개 방식'을 사용할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업계 자체의 기업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월트 디즈니처럼 스토리보드를 '해독'할 수 없는 임원들은 대본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장편 만화 영화는 9인의 늙은이 팀이 사용한 것과 동일한 시스템을 계속 사용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주말 「슈렉 2」가 개봉했다. 온갖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슈렉 2」이지만 여전히 아티스트들이 사각 종잇조각에다가 낙서하다시피 그린 그림으로부터 제작이 시작되며 이것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애니메이션 작업이 들어간다. 애니메이션 TV 시리즈와 TV 광고는 말할 것도 없고 픽사 영화 전체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제작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신속, 간편, 편리하며 효율적인 장면 스케치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추임이 드러남에 따라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이 거의 모든 형태의 영화 관련 이야기 전개에 이름 없는 영웅 역할을 계속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기술이 점차 디지털 영역으로 옮겨가고 애니메이션의 해외 외주 량이 늘어남에 따라 애니메이션에서 차지하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의 역할도 크게 바뀌었다.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기 위해 TV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기능을 갖춘 미술 기계로 진화해야만 했다. 본질적으로 만화 영화의 겉모습을 책임질 주력자는 이제 감독, 시트타이머(sheet-timer)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이다. 감독이 주로 영화의 전체적인 대강의 타이밍을 맡지만('슬러그(slug)'라고 주로 불림) 각 동작에 필요한 실제 그림 수는 타이머가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감독이 작은 밑그림인 대강의 섬네일(thumbnail) 그림에 관여하지만 본래 의도대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이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말처럼 '큰 권력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스토리보드가 미국 만화 영화를 좌지우지하는 로드 맵이 된 이후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은 공정에 참가하는 다른 어떤 아티스트보다 '기본을 더 많이 섭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현재 스토리보드의 대부분은 한국이나 일본으로 보내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지켜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스토리보드는 꼼꼼하게 구성되고 해독 방식이 명확해야 하며, 임의로 처리되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스토리보드를 시작하기 전에 TV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에게 캐릭터 디자인(주인공 예외)이 제공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특정 회에 새 인물이 나올 경우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직접 캐릭터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배경 디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동작에 맞는 캐릭터와 배경을 아티스트가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방식이 완성 작품에 이득이 된다. 예를 들어, 용이 등장하는 회가 있다고 할 때 캐릭터 디자이너가 단지 '멋지다'는 이유로 육중한 날개가 달린 거대한 용을 만들어냈다고 하자. 만일 이야기 전개 상 용이 도시 안에서 지면 가까이 날아야 한다면 육중한 날개로는 온갖 건물과 전선 등을 헤치고 날갯짓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는 대본에 나와 있는 여러 변수에 맞는 방식으로 용을 디자인할 것이다.
물론,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의 작업 부담은 그만큼 커진다. 그 뿐만 아니라 외주 처리되는 프로그램의 많은 수가 스토리보드 패널을 대강의 레이아웃으로 사용한다. 무슨 의미냐 하면 스토리보드 그림을 가지고 와서 TV 크기 비율에 맞게 확대 복사한 다음 그림을 베껴 그려 서 키 포즈(동작을 결정하는 기본 그림) 레이아웃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결국, 스토리보드 그림이 디즈니 '황금시대'에서처럼 대략적인 스케치로 그친다면 제대로 된 영상이 나올 수 없게 된다. 또한,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는 대부분 배우의 목소리를 먼저 녹음한 다음에 그림 작업이 들어가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은 제공되는 녹음 내용을 바탕으로 액션에 맞게 캐릭터들의 얼굴 표정과 몸동작을 그린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감독은 직접 실제 애니메이션 작업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캐릭터가 목소리 트랙에 맞게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지시하기 위해 스토리보드에 의존한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학원의 상당수는 아직도 3-40년대에 사용하던 한물 간 시스템을 가르치고 있다. 졸업생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게 되는 셈이다. 애니메이션 같은 분야에서 향수는 설 곳이 없다. 기술이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단지 옛날 방식으로 일하기를 위해 속도를 줄일 가능성은 없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 미국 애니메이션을 주도하는 것은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이다.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은 CGI 프로그램을 익히거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동향이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 덧붙이면, 업계가 그 어떠한 기술 발전을 이룩한다 하더라도 컴퓨터가 창의적인 능력을 갖추지는 못할 것이다(희망 사항). 그렇기 때문에 수작업 애니메이션이 CGI에 완전히 가린다고 해도 프로젝트 초창기에 생각 속에 그림을 그려 줄 사람이 계속해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의 역할이다.
[뉴타입 2004년 7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