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변화의 파도로 넘실대는 미국 TV 애니메이션계의 해변가. 올해 이 곳을 휩쓴 눈에 띄는 두 종류의 물결은 바로 아니메(anime: 미국에서는 동양계 애니메이션, 그 중 일본 애니메이션을 뜻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의 영향과 복고 향수이다.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경영진들은 「포켓몬」 열풍이 미국을 휩쓴 이래 아니메 각본을 사들여 미국 관객에 맞게 재포장해서 내놓는 것이 엄청나게 가능성 있는 사업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인기작품과 미국의 인기작품 간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때는 외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TV 전파를 타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왜냐하면 TV방송국 측에서는 대부분 미국 시청자들이 그내용에 공감할수 없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꽤 일반적인 주제를 갖고 있었던 「포켓몬」조차 미국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내용 중에 등장하는 일본의 고유 명절이라든지 관습을 '미국화'시키는 재편집과 대사 재작업을 자주 거쳤다.
「카드캡터 체리」와 「유희왕」은 모두 워너 브라더스 케이블 네트워크인 "키즈 WB"를 통해 방영되면서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으며, 만화 전문 케이블 TV 채널인 카툰 네트워크는 「카우보이 비밥」, 「프리크리」와 같은 아니메 프로그램을 여러 편 방영하기 시작했다. 아니메만 전문으로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이 있는 도시들도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국과 일본같은 아시아의 작품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에서도 뚜렷한 아니메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카툰 네트워크에서 방영한 「틴 타이탄」은 동명 DC 만화를 바탕으로 한 시리즈로서 특히 「프리크리」에서 가져온 듯한 시각적 언어를 비롯하여 아니메에서 영감을 받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카툰 네트워크에서 방영된 시리즈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워너 브러더스도 마찬가지로 「샤올린 대결」이라는 새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조그마한 어린 권법가가 등장하는데 액션은 「와호장룡」 느낌이 나고 디자인은 여지없이 산리오(「헬로키티」로 유명한 제작사) 색채를 띠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업체는 워너 브러더스 뿐만이 아니다. 니켈로데온은 최근 스타일은 물론 내용 역시 옛 「철완 아톰」 만화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사춘기 로봇으로 살아가는 내 인생」(My Life as a Teenage Robot)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업체라면 거의 모두 자체 '아니메 부서' 를 두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업체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숙달해 온 비법 캐내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미국 관객들은 한 때 업체 경영진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국적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최근 지배적인 또 하나의 경향은 과거의 아이디어를 되살려서 다시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히맨과 우주의 미스테리」는 「정의의 용사 카봇」(transformer)처럼 80년대 초반 인기 있던 장난감 및 카툰 시리즈다. 새롭게 단장한 이 두 프로그램 모두 이제 2-30대가된 옛 관객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타오르게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 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수 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제작되어 오기도 했지만 「정의의 용사 카봇」의 원작 프로그램은 그 인기가 널리 되살아나고 있다. 한 미국 대형 제작사에서 이 원작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실사 장편 영화를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복고적 향수 색채가 더욱 짙은 프로그램 중 하나는 미스터리 해결사 개 탐정 「스쿠비두」 신작 시리즈다. 「스쿠비두」는 한나-바버라 70년대의 모습을 재현한 원작 쇼 이래로 변함없는 인기를 누려 왔다. 지난 수 년 동안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TV시리즈가 수없이 제작되었으며 곧장 비디오로 출시된 애니메이션 영화도 여러 편, 그리고 속편이 준비되고 있는 실사 영화 한 편도 제작된 바 있다. 워너 브러더스와 카툰 네트워크는 최근 대피덕 주연의 「24.5세기의 덕 다저스」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1950년대 당시 잘 알려진 공상 과학 만화 「벅 로저스」를 흉내내어 애니메이션계의 전설적인 척 존스가 감독한 극장용 단편 만화 영화의 일종의 속편이다 「돌연변이 닌자 거북」은 범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닌자 훈련을 받은 네 마리의 돌연변이 청년 거북이를 다룬 시리즈이다. 끊임없이 관련 상품을 쏟아내고 영화도 여러 편 제작되면서 80년대를 풍미한 이 블록버스터 역시 미국 TV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과 함께 장난감, 만화, 비디오 게임을 비롯한 다른 관련 상품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동안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의 매체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문화적 장벽 속에 성장해 왔긴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떤 나라에서 만들어졌는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좋은 이야기에 호소력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는 것이다. 미국 매체 역사의 초기 시절은 대부분 외국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냈다.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구한 고대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국가라는 점 때문에 미국 고유의 문화가 자체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미국만의 독특성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미국은 다양한 혈통의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점 덕분에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두려움이 가라앉은 것 같다.
두 번째로, 우리는 과거를 통해 도움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최근 몇 년 동안 어려운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 때 당시 잘했던 것은 무엇이고 지금 잘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과거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가치 있는 방법이다. 좋은 아이디어란 낡아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옛날 아이디어를 다시 고쳐 쓰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낡은 제품을 새 포장에 싸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고객들에게 파는 데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안일함에 빠지기 쉽다. 이런 것은 어떤 의미로는 '후퇴' 로 볼 수도 있고, 젊은 학생이 나이 든 사부에게 한 수 배우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동향은 모래와 같이 철썩이는 파도의 움직임과 함께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른 어떤 종류의 예술에 못지 않게 애니메이션에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소개한 프로그램들 중 일부는 해변가에 아무렇게나 먹고 버려진 음료수 캔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프로그램들은 해변가에서 사람들이 찾아 낸 아름다운 조개 껍질처럼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될 수도 있다. 오직 시간과 시절의 변화만이 쓰레기와 보물 애니메이션을 구별해 줄 것이다.
[뉴타입 2003년 10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