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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자란 70년대는 유선 방송이 아직 없었거나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고 비디오도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직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볼거리라고는 TV에서 틀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때 즈음 내가 유일하게 본 '아니메'는 「달려라 번개호」(Speed Racer)였다. 비록 그 당시에는 다른 여느 만화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말이다. '스타일'의 차이는 눈에 띄었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좋든 나쁘든 간에 어쨌든 「달려라 번개호」는 아시아 만화로서 미국 주류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작품이 되었고 결국 일반 미국인 시청자들에게 다른 아니메를 비교할 수 있는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70년대 말이 되자 몇몇 아니메 작품이 미국 시장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독립 지방 TV 방송국에서 「독수리 오형제」(Battle of the Planets)와 「우주전함 V호」(Star Blazers)가 몇 회분 소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업체들의 주력 장르는 아직 주로 코믹 만화에 머물러 있었고 미국에서 만들어진 몇 안되는 액션물 시리즈들은 대개 질이 낮았다. 당시 본 아니메 작품과 디즈니/워너 브러더스/하나 바버라 등과의 차이점은 내게는 확실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후 70년대가 가고 80년대가 되면서 「마크로스」(Robotech), 「미래용사 볼트론」(Voltron)을 비롯한 몇몇 다른 아니메가 등장했다. 이러한 만화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만화 자체의 매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어느 국가에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시아 어린이들은 나만큼이나 공상과학을 좋아한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어린 시절 탐닉하던 미키 마우스 만화들과는 달리 이 만화들에는 내가 끌리는 지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미키 마우스, 딱다구리, 바니 등의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기 바란다. 다만, 아니메에는 뭔가 내게 웅변하는 것이 있었다.
  이 때에 즈음하여 유감스럽게도 미국 만화는 끝없는 지루함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 했다. 그림이 엉망이거나 「히맨」같은 장난감 제품의 '30분짜리 광고'이거나 설교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TV 만화에서 묘사되는 폭력과 그 폭력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소위 '부정적인 영향'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부모들은 TV 방송사가 자체 검열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갑자기 만화는 일정 부분 '교육적인 내용'을 포함하도록 의무화되었다. 그 교육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대개 등장 캐릭터 중 하나가 '이웃 사랑'이라든지 '치아 관리법' 따위를 이야기하는 매우 지루한 순서를 만화 끝부분에 삽입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화를 사랑한 만큼이나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황량하게 변했다. 내가 십대가 된 무렵에 미국 청년 문화 내에서 만화는 별 볼일 없는 '비인기'종목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십대들은 어른들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어했고 어른들은 당시에 전혀 만화를 보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이라는 용어조차 오늘날처럼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며 아니메나 다른 종류의 만화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 움직이는 그림이면 만화 영화였고 만화 영화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것이었다. 이 때 즈음 VCR이 점점 더 많이 보급되어서 여기 저기 생겨난 비디오 가게가 다양한 비디오를 구비하기 시작했다. 「우주전함V호」와 「마크로스」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 때문에 나는 아니메를 더 찾아보려고 비디오 가게와 통신 판매 카탈로그를 뒤지곤 했다. 그러던 중 망가는 물론 일본 및 한국 아니메 팬 잡지(그 중에는 일본의 뉴타입도 있었다!)를 파는 동네 만화 가게를 발견하여 망가와 잡지를 잔뜩 사들고 올 수 있었다. 글은 읽을 수 없었지만 멋진 미술 스타일만은 열심히 보았다. 나의 아니메에 대한 사랑은 대학 시절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욱 커져갔다. 「천공의 성 라퓨타」(Castle in the Sky)를 손에 넣었었는데, 비록 등장 인물들의 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을 망정 그 극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스토리가 매우 명확했기 때문에 3년 전에 영어 자막이 된 버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재미 못지 않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한 90년대에 이르자 미국의 만화에 대한 사랑이 다시 불붙었고 아니 메 역시 그 덕을 보게 되었다. 비디오 가게와 TV 방송사들이 갑자기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가운데 미국에서 아니메의 인기는 계속 커졌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며 아니메의 인기는 공상과학, 공포, 폭력 등을 선호하는 성인층을 주 대상으로 하는 컬트장르에 계속 국한되어 있었다. 소수의 애니메이션 매니아들 사이에서 「아키라」 (Akira), 「무사 쥬베이」(Ninja Scroll), 「뱀파이어 헌터 D」(Vampire Hunter D)와 같은 작품은 최고였다. 물론 관객층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두 성인들이었다. 그러던 중 「포켓몬스터」(Pockemon)가 등장했다.
  「포켓몬스터」의 등장과 흥행은 그야말로 바로 아니메가 주류 미국 관객들을 파고드는데 필요했던 막대한 블록버스터 흥행 성공이었다. 「포켓몬스터」는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아이들, 십대, 심지어 어른들까지 '포켓몬 열풍' 에 휩싸였고 다른 매체에서도 너도나도 이 새로운 유행에 편승하여 돈을 벌고자 했다. 유선 방송국과 미국 배급사에서는 아니메 작품이라면 닥치는 대로 소유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디즈니에서는 미야자키 감독 작품의 미국 배급권을 구입했고 아니메에 대한 수요는 계속해서 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아니메를 미국에서 구하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것은 나의 큰 기쁨이다. 이제 「신세기 에반겔리온」(Neon Genesis Evangeleon), 「카우보이 비밥」(Cowboy Bebop), 그리고 걸작인 「프리크리」(FLCL)을 즐길 수 있다. 마치 우리 동네 DVD가게에서는 내가 맛볼 수 있도록 매일 신작 아니메 타이틀을 구비해 놓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는 잘 알려진 인기 작품도 있고 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있지만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점을 갖고 있다. 33세의 나이에 이제 치료 불능의 아니메 "중독자"가 되어버린 나, 하지만 아니메에 대한 나의 사랑은 기나긴 즐거움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와 영화 제작자로서의 능력도 향상시켜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행의 주기가 비교적 짧은 미국에서 아니메의 유행만은 계속해서 탄력을 받고 있다. 비록 언젠가 그 추세가 한풀 꺾인다 할지라도 아니메는 이미 미국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이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침내 일반 관객들이 아니메가 제공하는 그 다양한 세계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아니메가 매체의 일부분으로 깊숙이 자리잡은 가운데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들은 아니메 스타일을 보다 신중하게 관찰하고 아니메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도가니'의 나라 미국은 점점 더 이국적인 풍미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로서는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이제 막 미국에서 꽃피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한때 아니메가 대중 앞에 나오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문화적 장벽은 무너지고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유하는 문화가 서로에게 즐거움을 줄뿐만 아니라 이 놀랍도록 영향력 강한 예술 형태를 통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뉴타입 2003년 11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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