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ASIFA(국제 애니메이션 필름 협회) 헐리우드 지부는 디즈니 TV 애니메이션, 필름 로만, 소니, 클라스키 츄포 등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TV 애니메이션의 현황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의 목적은 TV 애니메이션 업계의 미래에 대해 논의할 뿐 아니라 현재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각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의 대표들에게는 제작현황, 개발 중인 작품, 채용 현황, 새 작품 피칭 절차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작품 피칭이란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스토리 작가 등의 창작자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애니메이션 업체에 넘겨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자 애니메이션 업체에 문서화된 아이디어를 제출하는 것이다(피칭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 칼럼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L.A.의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 중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피칭 기회를 열어 놓는 업체도 있는 반면, 에이전트나 흥행 사업 전문 변호사 등을 통한 모종의 대행 업무를 거쳐야만 작품을 피칭 고려 대상에 넣는 업체도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업체마다 내건 조건은 각자의 필요에 맞게 각각 달랐다. 예를 들면 소니 애니메이션에서는 「맨 인 블랙」과 같은 기존의 영화만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클라스키 츄포의 경우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유럽식 미술 스타일에 맞는 컨셉을 채택한다. 디즈니에는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오랜 기준이 있다. 필름 로만은 장르, 스타일, 관객 등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가장 개방적인 편이다. 그런데 모든 업체가 만장 일치로 열렬하게 뜻을 같이 한것이 있었으니 바로 다들 「네모네모 스펀지송(Spongebob Squarepants)」※1의 뒤를 잇는 히트작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도 이 유행의 열풍이 상륙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네모네모 스펀지송」이란 놀기 좋아하는 주근깨 투성이의 왕눈이 스펀지가 반바지를 입고 물 속에서 벌이는 별난 모험을 그린 니켈오데온의 시리즈로서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네모네모 스펀지송」은 스티브 힐른버그(Steve Hillenberg)가 제작한 자그마한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여 1999년 니켈오데온에서 첫 전파를 탄 이래, 지금은 수백만 달러짜리 프랜차이즈 상품으로 성장했다. 현재 케이블 TV 1순위 프로그램이며 TV 시청률에서도 상위 38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성별, 연령의 벽을 뛰어넘어 청소년, 대학생, 성인 등등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미국에는 대형 수퍼마켓 체인점에서 부터 구멍 가게에 이르기까지 「네모네모 스펀지송」 상품 특별 코너를 마련하지 않은 가게가 거의 없을 정도다. 지금은 새 에피소드 제작이 중단된 상태지만 대신 극장판 「네모네모 스펀지송」이 제작 중이다. 이 만화와 그 주인공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기 때문에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라면 하나 걸러 하나씩은 한 몫 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개발 담당자들은 「네모네모 스펀지송」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정확히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러한 성공 사례에 대한 비밀 공식을 설명하는 그럴 듯한 이론을 누구나 내놓고 있긴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비밀 공식이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네모네모 스펀지송」은 간단히 말해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 일 뿐이다.
「네모네모 스펀지송」은 우스꽝스러운 짓을 즐기는 고전적인 만화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실무진들이 시장 조사를 하고 집중 그룹 시험을 거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웃기기 좋아하는 만화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부엌용 스펀지가 나와서 떠드는 이런 바보 같은 만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받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미국에서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작품이 시작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자료를 분석하여 특정 연령, 그룹 성별의 시청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는 하나의 특정 그룹을 공략하기 위한 물량 확보와 조정에 나선다 「네모네모 스펀지송」과 같은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마법 공식을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수십만 달러를 투자하여 오랜 시간 끊임 없이 연구한다.
「네모네모 스펀지송」이 인기 있는 이유는 어린애처럼 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사람이나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스펀지송이 노랗기 때문이다, 7살에서 13살 사이의 중산층 소년들이 스펀지송의 내적 동기에 공감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등등 연구원들은 갖 가지 주장을 내놓을 것이다. 이러한 전국적인 인기를 재현할 수만 있다면 구체적인 어떤 것이라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적인 접근 방식이 원하는 성과를 거두는 일은 드물다. 제2의 「네모네모 스펀지송」을 만들기에 급급한 헐리우드의 모든 화가와 작가들이 원작에서 눈에 띄는 기본적인 요소를 낯두껍게 닥치는 대로 베껴 대는 것이 보통이다.
제2의 스펀지송은 의외로 윈래의 것과는 아주 딴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야! 러그래츠」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도 너나 할 것 없이 이것 저것 뒤섞어서 모방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네모네모 스펀지송」과 「야! 러그래츠」는 전혀 다르다.
물론, 이러한 회의 방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작품이라고 해서 다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아주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네모네모 스펀지송」처럼 단순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성공적인 작품이 정말 계산된 공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모든 TV 시리즈는 「네모네모 스펀지송」처럼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얘기다.
공장에서 생산되듯 개발된 작품이 옛날 방식의 좋은 만화가들과 같은 성공을 거둔 적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TV 만화 제작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 부담이 따르는 도박이다. 다들 대히트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참패하고만 작품들이 등장과 퇴장을 거듭하는 것을 지켜본 바 있다. 어느 업체든 투자한 자본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겠지만 그런 것이 애니메이션은 물론 일반적인 예술 분야에서의 속성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유행은 바뀐다. 대중들은 오늘 관심 있던 것에 다음 날 싫증을 낼 수도 있다. 대중 문화는 정확한 과학은 아닌 것이다.
만화 주인공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다. 즐거움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자라나야지, 접시에 배양하거나 복제하거나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진정으로 성공한 만화 주인공들은 모두 그들을 창작한 사람들의 사랑을 통해 처음 태어났다. 스펀지송, 미키 마우스, 바니, 바트 심슨, 렌과 스팀피, 스누피, 딱다구리 다른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이들도 모두 창조되었다. 들려 줄 이야기가 있는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서.
※1:「Spongebob Squarepants」는 국내에 「네모네모 스펀지송」(EBS), 「보글보글 스폰지 밥」(JEI 스스로방송)으로 소개되었다.
[뉴타입 2003년 4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