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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 '퇴폐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인상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해외 매체의 미국 문화 패러디에서는 '미국적'인 사람이나 사물의 특징을 묘사할 때 으레 섹스, 폭력, 욕설을 동원한다.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악의 없는 놀려먹기 식 유머에 기분이 상하는 사람은 아니다. 본인은 물론 지인들 대부분도 이것을 문제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미국 특유의 문화적 결점을 같이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미국은 자국의 매체와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한 충격적일 정도로 점잔을 빼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사회 자체는 극도로 문란하고 거칠며 상스러운 언어가 난무하는 반면(자유가 전혀 통제되지 않는 사회가 낳은 부산물이지만), 엔터테인먼트는 다른 국가의 매체와 비교했을 때 극도로 메말라 있다. 미국은 모든 민족과 문화를 공평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특정인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국가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 때문에 미국 매체는 스스로를 'PC(Political Correctness: 인종, 성별 등의 차별을 암시하는 언어 등의 사용을 지양하는 운동)'라는 감옥에 가두었다. PC의 기준은 단 한 사람의 기분이라도 상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 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액션, 드라마, 코미디, 비극 등이 모두 '고통'과 '희화화'의 묘사에 크게 의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애니메이션을 아직 아동용 매체로 보는 경향이 대세인 미국에서는 실사 영화나 프로그램보다 '자체 검열'의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진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는 아동용 만화 영화에서 '모방 가능한 행동으로 간주될 만한 것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즉, 만화 영화 주인공은 어린이가 따라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덕분에 저속한 폭력과 총기류의 사용은 물론 총기류 묘사조차 사라졌고 그 밖에 성인 관객들이 오랜 시간동안 즐겨 왔던 만화 영화 소재들도 많이 없어졌다. 인종이나 성별 편견에 관련된 것은 특히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통상적으로 특정 인종이나 성별의 악역 하나가 해당 그룹의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어린이 시청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으므로 동일한 프로그램에 역시 같은 인종이나 성별의 '착한' 배역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치거나 때리거나 넘어뜨릴 수도 없었고, 필자가 참가했던 어떤 작품에서는 '무례하다'는 이유로 서로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없었다. 등장인물들의 사용 언어가 크게 순화된 경우도 많았다. 필자가 참가했던 어떤 작품에서는 상대방을 '멍청이'라고 부르는 장면 때문에 대본을 다시 써야한 적도 있었다. 혹시나 그 프로그램을 보고 어떤 어린이가 겁도 없이 부모님을 '멍청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 어린이의 부모님이 방송국을 고소할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요즘 어린이용 만화 영화에서 총기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군인이나 경찰이 나와도 총이나 심지어 총 비슷한 것조차 들어가서는 안 된다. 대신 몽둥이 같은 둔기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 시청자들이 만화 영화에서 피를 보면 굶주린 흡혈귀로 변신할까봐 그랬는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특히 디즈니 영화)의 대부분은 유혈 장면묘사를 중단한지 오래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당시 제작 중이던 만화 영화 중 상당수의 작품들은 비행기, 건물, 대규모 폭발, 추락 등이 등장하는 장면을 즉각 수정함으로써 그 날 발생한 가슴 아픈 사건이 떠오르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만화 영화에서 폭력은 그래도 일정 수준 용인되지만 이상하게도 섹스는 그 어떤 종류도 절대 금기 사항이다. 줄거리 맥락이나 성격과 관계없이 누드나 그 밖에 성적인 것이라면 양성, 동성, 기타 할 것 없이 한 치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결국,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 최근 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방송사들은 더 많은 소송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2월 1일 수퍼보울 하프타임 쇼에서 팝 가수 재닛 잭슨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댄스 공연을 하던 중 벌어진 일이다. 이미 섹시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팀버레이크가 재닛 잭슨의 상의를 잡아 뜯는 바람에 재닛 잭슨의 젖가슴이 전부 드러났다(노출 시간은 약 1.5초미만). 이 황당한 장면은 전국 9천만 미국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고 전국은 순식간에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CBS에는 당장 성난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다음 날 연방통신위원회(FCC)는TV, 라디오, 영화의 '부적절한' 내용에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이후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 FCC는 라디오 방송국의 무단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대역폭을 감시하는 역할만 하는 단체인데 이제는 미국의 모든 매체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권력자가 되었고, 미국이 청교도 사회가 되는 것을 꿈꾸는 소수의 힘 있는 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좌지우지되고 있다. 또한, 장편 영화의 등급을 정하는 위원회도 본격적인 성인 영화에서 허용되는 표현의 범위에 대해 더욱더 엄격해졌다. 이것이 애니메이션 작업자는 물론 경영진 모두에게 큰 올가미가 되었다. 작업자들은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목적으로 고용되었지만 경영진들은 소송의 가능성과 평판이 좋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작업자들이 '숨 쉴 공간마저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올가미는 더욱더 조여들어서 예술, 드라마, 비극, 코미디 등의 장점을 갖춘 어떠한 애니메이션도 만들기가 더욱더 힘들어질 것이다.
  PC 기준은 '공공 소비에 적합한 것'이라 간주되는 것을 지시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모든 형태의 미국 엔터테인먼트를 질식시킬 위험이 있는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되어 버렸다. 보통의 시청자라면 해가 바뀌어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업계 종사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 영향을 받는다.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인생의 진실이다. 그러나 PC 기준이 너무 엄격해져서 우리가 표현하는 이야기는 점점 더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 이렇게 엄격한 지침으로 인해 한국, 일본, 그 밖의 지역에서 미국에 상륙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
  이론 뿐인 이야기지만, 매체를 통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정확히 말하자면 '덜 추하게') 그림으로써 사회 자체가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닮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 동안 미국 사회가 변화해 온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변한 것은 많지 않고 삭막한 매체 덕분에 상황은 악화되었다. 미술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식적인 조명 아래자화상을 그리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즉, 추한 진실로부터는 숨고 아름답지만 사실과 거리가 먼 거짓말에 둘러싸여 살게 해 주는 것이다.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 수단인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멋진 모습뿐만 아니라 결점을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양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이러한 정직함과 자기 관찰이야말로 더 나은 모습의 자아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아무런 결점 없는 모습으로 현실을 '덧칠'한다면 진정한 현실을 나타내지 못하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바보 같은 동화일 뿐이다.

[뉴타입 2004년 6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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